필사
통필사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해볼 것들
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쓰는 통필사를 시작하기 전, 책과 노트 선택부터 분량과 속도, 중단했을 때 다시 이어가는 방법까지 정리했습니다.
통필사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해볼 것들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쓰는 필사와 달리, 통필사는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쓰는 일이다. 책 한 권이 그대로 노트에 쌓인다는 점이 멋져 보여서 시작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도 처음에는 책과 노트만 준비하면 자연스럽게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면 문장을 고르는 필사와는 조금 다르다.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도 건너뛸 수 없고, 같은 표현이 이어지는 부분도 그대로 써야 한다. 그래서 통필사는 글씨를 잘 쓰는 일보다 오래 이어갈 방법을 먼저 생각해두는 편이 좋았다.
정말 끝까지 쓰고 싶은 책인지
통필사할 책은 단순히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르기 어렵다. 읽을 때 좋았던 책과 한 문장씩 옮겨 쓰고 싶은 책은 의외로 다를 수 있다. 문장의 리듬이나 번역 문체가 손으로 쓸 때도 편안한지 몇 쪽 정도 미리 써보면 판단하기 쉽다.
처음부터 분량이 긴 책을 고를 필요도 없다. 완성했을 때 근사해 보이는 책보다, 중간의 평범한 문장까지 천천히 따라가 보고 싶은 책이 오래 남는다. 아무래도 첫 통필사라면 끝이 보이는 얇은 책이 부담도 덜하다.
책보다 노트 분량이 더 커질 수 있다
인쇄된 책 한 쪽은 생각보다 많은 글자를 담고 있다. 책은 얇아 보여도 손글씨로 옮기면 여러 권의 노트가 필요할 수 있다. 글씨 크기와 줄 간격에 따라 차이가 커서, 시작 전에 책 한 쪽을 실제로 옮겨 쓰고 전체 분량을 대략 계산해보는 것이 좋다.
노트를 한 권으로 통일할지, 같은 종류를 여러 권 이어 쓸지도 미리 정해두면 편하다. 단종될 가능성이 있는 노트라면 여분을 준비해둘 수 있고, 꼭 한 종류만 고집하지 않겠다면 권마다 종이나 색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것은 중간에 노트가 달라져도 실패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루 분량은 조금 작게 잡는다
시작한 날에는 의욕이 있어 여러 쪽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 속도를 매일의 기준으로 삼으면 금세 부담이 된다. 하루 두 쪽을 목표로 정했다가 한 쪽밖에 못 쓴 날이 이어지면, 쓰지 않은 분량이 숙제처럼 남기도 한다.
나는 최소 분량을 한 쪽보다 더 작게 잡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문단 하나나 십 분처럼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기준이면 바쁜 날에도 노트를 펼칠 수 있다. 더 쓰고 싶은 날에는 계속 쓰면 되고, 정한 만큼만 쓴 날에도 계획을 지킨 셈이 된다.
도구를 완벽하게 맞출 필요는 없다
긴 글을 쓰려면 손에 무리가 적은 펜과 번짐이 적은 종이가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시작 전에 만년필과 잉크, 노트를 완벽한 조합으로 맞출 필요는 없다. 한동안 써봐야 무게가 불편한지, 잉크가 너무 늦게 마르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구가 불편하면 중간에 바꿔도 괜찮다. 한 권 안에서 잉크 색이 달라지거나 글씨 굵기가 바뀌는 모습도 그동안 사용한 도구의 기록이 된다. 처음 정한 형식을 끝까지 지키는 것보다 계속 쓸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
틀린 글자를 어떻게 남길지 정한다
통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빼먹거나 같은 문장을 두 번 쓰는 일이 생긴다. 매번 새 종이에 다시 쓰려고 하면 진도가 나가기 어렵다. 수정테이프를 쓸지, 한 줄로 지우고 옆에 바로잡을지, 작은 표시만 남길지 간단한 규칙을 정해두면 망설이는 시간이 줄어든다.
나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고치고 계속 쓰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오탈자 하나 없는 노트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착한 노트가 통필사의 목적에 더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어긋난 글씨까지 그대로 쌓이면 오히려 손으로 쓴 기록다운 모습이 된다.
쉬었다가 다시 이어도 된다
통필사는 며칠 만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꾸준히 쓰다가도 일정이 바빠지거나 다른 책을 읽고 싶어 한동안 멈출 수 있다. 쉬는 날이 생겼다고 그동안 쓴 분량까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시작할 때는 밀린 분량을 채우려고 하기보다 마지막으로 쓴 문장을 읽고 다음 한 줄을 옮기면 된다. 날짜를 적어두면 긴 공백도 기록의 일부로 보인다. 통필사는 매일 빠짐없이 쓰는 일이 아니라, 멈춘 뒤에도 돌아올 자리를 남겨두는 일에 가깝다.
끝내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
통필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책과 노트, 하루 분량, 수정 방법 정도만 정해두어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쓰면서 바뀔 수 있다. 처음 세운 계획이 달라졌다고 해서 통필사가 흐트러진 것은 아니다.
한 권을 끝까지 옮겨 쓰는 동안에는 문장의 좋은 부분뿐 아니라 느리고 평범한 부분도 함께 지나가게 된다.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준비는 거의 끝난 셈이다. 서두르지 않고 다음 문장을 이어 쓰는 것, 결국 통필사에서 가장 오래 남는 기준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