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만년필로 필사를 시작하고 달라진 것들
만년필로 필사를 시작한 뒤 달라진 독서 습관과 글씨를 대하는 마음, 펜과 잉크를 고르는 기준에 관해 기록했습니다.

만년필로 필사를 시작하고 달라진 것들
처음 필사를 시작했을 때는 글씨를 조금 더 예쁘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천천히 옮겨 쓰면 자연스럽게 글씨도 단정해질 것 같았다. 만년필 역시 필사를 위한 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몇 권의 노트를 채우는 동안 달라진 것은 글씨체만이 아니었다.
필사를 시작한 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글을 읽는 속도였다. 예전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바빠 문장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제는 마음에 걸리는 문장을 만나면 잠시 멈춘다. 그대로 읽을 때는 금방 지나갔던 표현도 손으로 옮겨 쓰면 단어의 순서와 문장의 호흡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왜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 문장이 어디에서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지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읽는 것과 쓰는 것 사이
눈으로 읽은 문장을 손으로 다시 쓰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그 느린 속도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쪽 읽지 못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같은 문장을 다시 쓰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필사를 계속하면서 그 느림이 오히려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빠르게 읽을 때는 줄거리만 기억에 남지만, 천천히 옮겨 쓴 문장에는 그날의 분위기까지 함께 묻어난다. 어떤 문장을 쓰다가 오래 멈추었는지, 어느 부분에서 잉크가 진하게 고였는지 같은 사소한 흔적도 한 권의 기록이 된다.
글씨를 대하는 마음
필사를 한다고 해서 글씨가 갑자기 반듯해진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획이 고르게 이어지고, 어떤 날은 장력이 흐트러지듯 글씨의 크기와 간격도 제각각이다. 예전에는 그런 페이지를 보면 다시 쓰고 싶었지만, 이제는 조금 삐뚤어진 글씨도 그대로 남겨둔다.
완벽한 글씨보다 일정한 시간 동안 한 문장에 집중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글씨를 보고 있으면 그것도 일기의 한 형태처럼 느껴진다. 날짜를 적지 않아도 어느 날은 차분했고, 어느 날은 마음이 급했다는 것이 페이지에 남아 있다.
만년필과 잉크를 고르는 즐거움
필사를 시작한 뒤에는 만년필과 잉크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색이 예쁘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제품에 눈이 갔다. 오래 써 보니 필사에서는 손에 느껴지는 무게, 펜촉이 종이를 지나는 감촉, 잉크가 마르는 속도처럼 작고 현실적인 부분이 더 중요했다.
같은 문장도 어떤 펜과 잉크로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짙은 청색 잉크로 쓴 문장은 차분해 보이고, 붉은빛이 도는 잉크로 쓴 문장은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날 읽을 내용과 기분에 맞춰 잉크를 고르는 시간도 필사의 일부가 되었다.
조용히 집중하는 시간
하루 동안 여러 화면과 짧은 글을 계속 보다 보면 생각이 쉽게 흩어진다. 필사를 할 때만큼은 한 문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과 손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알림을 확인하거나 다른 일을 동시에 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금 쓰고 있는 문장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루에 많은 분량을 쓰지 못해도 괜찮다. 한두 쪽을 채우고 펜을 내려놓으면 잠시 어지러웠던 생각이 정돈된 느낌이 든다. 필사는 무언가를 빠르게 완성하는 취미라기보다,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일부러 마련하는 시간에 가깝다.
한 권을 채워 가는 일
필사 노트는 짧은 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쓰다가 한동안 펼치지 못할 때도 있다. 다시 시작하면 지난 글씨와 지금의 글씨가 달라 보이고, 사용하던 잉크의 색도 낯설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빈 페이지가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 다시 다음 문장을 쓰고 싶어진다.
만년필로 필사를 시작한 뒤 달라진 것은 결국 문장을 대하는 태도였다. 더 천천히 읽고, 오래 바라보고, 쉽게 지나쳤던 표현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잘 쓰는 것보다 계속 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직 채워야 할 페이지는 많다. 서두르지는 않으려 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잠시 멈추고, 그날 손에 잡히는 만년필로 한 줄씩 옮겨 쓰면 된다. 그렇게 쌓인 문장과 시간은 언젠가 한 권의 노트보다 더 긴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